모두를 위한 게임 취급 설명서
제목처럼 설명서 같은 앞부분과 <한국, 남자, 게임> 같은 뒷부분(나는 <한국, 남자> 안 읽었지만 대충..뭔 말인지 알지). 사실 앞부분은 대부분 아는 내용이거나 놀라울 것이 없는 실태 조사여서 휙휙 넘겼고 뒷부분은 평소에, 최근 몇년동안 점점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들. 내가 속한 업계에서 한두 회사도 아니고 집단적으로 벌어졌던 불합리한 사상 검증, 라스트오브어스2나 호라이즌 제로 던 같은 걸 재밌게 하고 나서 검색해 보는 순간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분노들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던 경험, 당근마켓에 게임 타이틀 팔러 갔다가 여자분이 이런 걸 하시네요 소리 듣고 짜증 난 상태로 돌아온 날들.
🔖 게임에 대한 검열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부당한 검열이고, 어떤 것이 논의해볼 만한 이야기인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구분 속에서의 토론을 통해 합리적 기준을 만들어가는 것이 업계와 팬 모두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현재 게임계의 대응은 이 두 가지를 그냥 모두 '검열'로 퉁치고 있는 것에 가깝다. 여기서 일어나는 한가지 얄궂은 일은, 게이머들이 '내 맘대로 게임할 권리'를 외치며 검열에 분노할 때 그것이 권력에게는 별다른 타격이 되지 못하지만, 소수자들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게이머에게는 같은 검열에 대한 저항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소수자에 대한 차별에 동참할 뿐인 결과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 많은 게이머가 PC나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뭐가 과도한지는 알 수 있는 신묘한 판단력을 갖추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 PC가 게임의 재미를 망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가 비백인이고 성소수자라 한들, <슈퍼마리오>가 재미없어질 수 있을까? 내 캐릭터를 흑인 동성애자여성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몬스터헌터>에서 빼앗을 수 있는 재미란 대체 무엇일까? 사실은 모두가 게임 캐릭터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ㅇㅇㅇ는 나야, 둘이 될 수 없어'라고 생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폭력적인 게임이 모방 범죄를 낳는다는 주장에 대해 '게이머들에게는 판단력이 있으며, 게임을 한다고 해서 그것을 모방하고 싶어지는 건 아니'라는 유구한 방어 논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 한국 게임업계에도 사상검증 같은 어이없는 사태에 맞서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힘이 없었다. 대부분의 업계는 소비자의 뒤에 숨었고, 매체들 역시 모두 침묵으로 일관했다. 모두가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며 도망치기에 바빴고, 사과를 해야 할 이들이 아니라 트롤들에게 납작 엎드려 그들을 더욱더 기고만장하게 했다. 전 세계가 차별의 문제를 해결하려 고민하고 있는 지금, 한국 게임계에서 소수자 문제와 페미니즘은 금기어처럼 여겨진다. 한국의 주요 게임업계는 더 나은 것을 제공하고 소비자를 설득하지 않고, 소비자들의 비위를 적당히 맞춰주면서 그들이 영원히 돈 넣는 기계로 남길 바란다.
'게임은 문화다' 캠페인이 초라해지는 것은 이런 상황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게임문화'라고 자신있게 소개할 수 있을까? 언제나 욕설로 뒤범벅되는 게시판과 채팅창인가, 남성 중심의 게임 커뮤니티의 집단 트롤링인가, 여성 게이머에 대한 성폭력인가? 그저 변호사나 의사가 게임을 하면 게임은 문화가 되는가? 이것이 다 게임 탓이라는 것은 사실 앞뒤가 바뀐 말이다. 오히려 세상이 게임에 반영되고 있다. 현실의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현실의 스트레스와 분노가, 현실의 능력주의와 약강강약의 비열함이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다는 사이버 세상 속에서도 그 지긋지긋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다. 오늘날 게임과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에 그다지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 게임에는 그럴 수 있는 잠재력이 있고, 이미 그런 잠재력을 보여준 많은 게임이 있었음에도 말이다.